왕들의 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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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з серии: 마법사의 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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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개리스 왕자는 빠른 거름으로 거처로 향했다. 축제에서 벌어진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치밀하게 계획한 일들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걸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개리스 왕자는 토르라는 멍청한 외부인이 어떻게 그의 계획을 알아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토르라는 녀석이 아버지의 술잔을 낚아채버리기까지 했다. 개리스 왕자는 토르가 몸을 날려 술잔을 엎어버린 순간을 떠올렸다.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와인이 쏟아지는 걸 보며, 그의 모든 꿈과 염원 또한 함께 쏟아지는 걸 바라봐야 했다.

개리스 왕자가 망가져버린 순간은 바로 그 때였다. 그 동안 그를 지탱해주었던 욕망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개가 와인을 핥고 모두 앞에서 죽은 순간 개리스 왕자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예감했다. 눈 앞에서 그간 살아왔던 나날들이 스쳐갔다. 자신의 독살 음모가 이제 만 천하에 드러나 아비를 죽이려 한 죄로 평생을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최악의 상황엔 죽음을 면치 못한다. 바보 같은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이따위 암살계획은 애초부터 진행하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 마녀를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적어도 개리스 왕자는 빠른 조치를 취해 추궁을 막았다. 절묘한 순간에 기회를 포착해 벌떡 일어나 가장 먼저 토르에게 죄를 뒤집어 씌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렇게 찰나의 순간에 적절하게 대응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위기가 닥치자 기발하게도 벗어날 계책이 떠올랐고 그도 놀랄 만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병사들은 토르를 끌고 갔다. 이후 축제의 분위기는 다시 고조됐다. 물론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지만 적어도, 모든 의심은 토르에게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이대로 모든 게 머무르길 바랬다. 맥길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었기에 이번 암살 시도를 좀 더 세밀하게 조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독살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버지는 막강했다. 개리스 왕자는 이를 간파했어야 했다. 개리스 왕자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었다. 이제 그는 모든 의심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무슨 수를 쓰든 토르에게 확실히 죄를 묻게 해 그를 처형시켜야 했다.

개리스 왕자는 스스로의 잘못을 만회하려 했다. 독살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뒤 그는 암살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제 개리스 왕자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자신의 계획이 어긋난 걸 보며 자신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원치 않는 다는 걸 느꼈으며 더불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왕이 되지 못한다. 아마도 평생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축제를 끝으로 개리스 왕자는 마침내 타오르던 야심을 단념할 수 있었다. 적어도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비밀을 품고, 은폐하고, 혹시라도 들킬까 봐 마음을 졸여야 하는 커다란 고통을 감내하며 다시 그런 시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개리스 왕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울 일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다 보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마침내 개리스 왕자는 서서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서야 본래의 평정심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취침을 준비하던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펄스가 불쑥 나타났다. 미친듯한 모습으로 눈을 크게 뜨고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듯 방으로 들어왔다.

“죽었어!” 펄스가 소리쳤다. “죽었어! 내가 죽였어. 그가 죽었어!”

펄스는 발작을 하는 듯 울부짖었다. 개리스 왕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술에 취한 거라 생각했다.

펄스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방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벌벌 떨고 있었고 울부짖으며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펄스의 손바닥에 묻은 피를 주시했다. 펄스의 노란 상의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개리스 왕자의 심장이 철렁했다. 펄스가 누군가를 살해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누구인 것인가?

“누가 죽은 거야?” 개리스 왕자가 물었다. “도대체 누구 얘길 하는 거야?”

그러나 여전히 펄스는 제정신이 아닌 듯 넋이 나가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펄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세게 쥐고 흔들어댔다.

“대답해!”

눈을 뜬 펄스는 소의 눈망울 같은 두 눈으로 개리스 왕자를 바라봤다.

“네 아버지! 폐하! 왕이 죽었어! 내 손에!”

펄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개리스 왕자의 심장을 찌르는 듯 했다.

개리스 왕자는 놀란 눈으로 펄스를 주시하며 온몸이 굳어가는 걸 느꼈다. 왕자는 어깨를 쥔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나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펄스의 몸에 묻은 피를 보자 펄스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왕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펄스? 저 얌전한 아이가? 내가 아는 이들 중 가장 마음이 약한 녀석이? 내 아버지를 죽였다고?

“그런데…그게 말이 돼?” 개리스 왕자가 물었다. “대체 언제?”

“왕의 침실에서 그랬어,” 펄스가 대답했다. “바로 방금 점에. 폐하를 찔렀어.”

이제서야 실감이 난 개리스 왕자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방문이 열린걸 확인하고는 달려가 병사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했음을 확인하고는 문을 닫았다. 다행히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개리스 왕자는 방문을 닫았다.

왕자는 재빨리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는 펄스를 진정시켜야 했다. 펄스에게 물어봐야 할 게 많았다.

왕자는 펄스의 어깨를 잡아 돌려 세웠다. 마침내 펄스는 왕자를 제대로 쳐다봤다.

“내게 전부 다 털어놔,” 개리스 왕자는 냉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설명해. 왜 그런 거지?”

“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의아해하며 펄스가 되물었다. “넌 폐하를 없애고 싶어 했잖아. 독살이 실패했고. 내가 널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 생각했거든.”

개리스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왕자는 펄스의 셔츠를 움켜쥐고 몇 번이나 흔들어댔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개리스 왕자가 소리쳤다.

왕자는 자신의 모든 삶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것 같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새삼 충격적이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 누구보다 아버지가 독주를 마시고 사망하길 바랬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가 죽었다는 생각에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듯 가슴이 저며왔다. 죄책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찌됐든 그의 마음 한 켠에서는 왕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특히 이런 식의 죽음은 더더욱 원치 않았던 게 분명했다. 펄스의 손에. 게다가 단검에.

“이해할 수가 없어,” 펄스가 흐느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넌 폐하를 제거하고 싶어했어. 암살을 계획했었잖아. 난 네가 기뻐할 줄 알았다고!”

스스로의 모습에 놀란 개리스 왕자는 펄스의 얼굴에 정면으로 주먹을 날렸다.

“난 네게 이런 짓을 시킨 적이 없어!” 개리스 왕자가 화를 냈다. “난 절대 네게 이 따위 일을 명령한 적이 없어. 왜 죽였어? 널 봐. 피로 범벅이 돼 있잖아. 이제 우린 둘 다 끝장이야. 병사들이 우릴 잡는 건 시간문제라고.”

“아무도 못 봤어,” 펄스가 애원하듯 말했다. “근무시간 교체 때 몰래 숨어들어갔어. 아무도 날 못 봤다고.”

“그럼 단검은 어디 있는데?”

“단검은 거기 없어,’ 펄스가 떳떳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내가 처리 했어.”

“어떤 칼을 쓴 거야?” 개리스 왕자가 되물었다. 이 질문과 함께 왕자의 마음이 요동쳤다. 그의 죄책감은 걱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왕자는 어리석은 펄스가 남겼을 모든 흔적들과 펄스를 추적할 수 있는 혹시 모를 단서에 대한 생각에 집중했다.

“절대 추적할 수 없는 단검이야,” 펄스는 스스로 대견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냥 특색 없는 이름 모를 단검이야. 마구간에서 찾은 거야. 비슷하게 생긴 단검이 네 개는 더 있었어. 절대 추적하지 못해,” 펄스가 재차 강조했다.

개리스 왕자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 했다.

“그거 혹시 붉은 색 손잡이에 칼날이 휘어진 짧은 검이야? 내 말 옆에 꽂혀 있던?”

펄스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리스 왕자는 펄스를 노려봤다.

“이 머저리 녀석. 그 검은 얼마든지 추적이 가능 하다고!”

“그렇지만 아무런 표식도 없었단 말이야!” 펄스는 겁을 먹고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칼날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칼자루에 표시가 되어 있다고! 개리스 왕자가 고함쳤다. “칼자루 하단에! 넌 제대로 확인도 못했어. 멍청한 자식아.” 분노에 치민 개리스 왕자는 펄스에게 바짝 다가갔다. “내 말의 상징이 칼자루 밑에 새겨져 있다고. 그리고 왕족과 친분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그 검이 내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어.”

왕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펄스를 노려봤다. 펄스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 검을 어떻게 했어?” 개리스 왕자가 펄스를 재촉했다. “그 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그 검을 가지고 왔다고 말을 하라고. 제발.”

펄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잘 처리 했어.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거야.”

개리스 왕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확히 어디에?”

“요강 속에 담은 뒤 폐기 관에 쏟아버렸어. 폐기 관에서 쏟아진 오물 통은 매 시간마다 강에 버려진다고. 걱정 마, 왕자님. 이제 그 칼은 강물 속 깊숙이 있을 거야.”

때마침 성곽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잔뜩 긴장한 개리스 왕자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밖을 내려다보니 군중들이 일제히 성을 에워싸는 바람에 혼란과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울려 퍼지는 종 소리가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다. 펄스가 거짓을 말한 게 아니라는 사실. 그가 왕을 암살했다는 사실.

개리스 왕자는 온 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이렇게 엄청난 악행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 중에서 그 누구도 아닌 펄스가 이를 수행했다는 사실은 더욱 실감하기 어려웠다.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방문이 열리며 왕의 병사들이 재빠르게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개리스 왕자는 자신과 펄스가 체포될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병사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왕자님, 폐하께서 습격을 받아 자상을 입으셨습니다. 암살자가 지금 도주 중일 수 있습니다. 방안에서 안전하게 몸을 피하시길 바랍니다. 폐하께서는 위독하십니다.”

병사들의 마지막 말에 개리스 왕자의 머리카락이 꼿꼿이 일어섰다.

“위독?” 개리스 왕자가 말을 이었다. 위독이란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아직 살아 계신가?”

“네, 왕자님. 폐하께서는 꼭 쾌차하셔서 누가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했는지 반드시 밝혀내실 겁니다.”

짧게 예의를 갖춘 뒤 병사들은 빠르게 방 밖으로 나서며 방문을 닫았다.

개리스 왕자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펄스의 어깨를 틀어 잡아 석조 벽에 내팽개쳤다.

펄스는 커다란 눈으로 겁에 질려 말없이 왕자를 주시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개리스 왕자가 고함쳤다. “이제 우린 모두 끝났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펄스가 더듬거렸다. “…정말 죽은 줄 알았어!”

“넌 항상 확신한다고 하지,” 왕자가 분노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다 틀려!”

개리스 왕자에게 문득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 단검,” 왕자가 말했다. “더 늦기 전에 검을 반드시 되찾아야 해.”

“그렇지만 내가 이미 버렸어, 왕자님,” 펄스가 대답했다. “강물에 쓸려 갔을 거야!”

“폐기 관에 버렸다고 했지. 그럼 아직 강물에 버려진 건 아니야.”

“그렇지만 대체로는 그렇다고!” 펄스가 대답했다.

개리스 왕자는 더 이상 우물쭈물하는 이 머저리를 참을 수 없었다. 왕자가 지체 없이 문 밖으로 뛰어 나가자 펄스는 당황했다.

“나도 함께 갈게. 정확히 어디에 버렸는지 알려줄게,” 펄스가 말을 건넸다.

개리스 왕자는 복도에 멈춰 서서 뒤돌아 펄스를 주시했다. 피로 범벅이 된 그를 병사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아할 뿐이었다. 운이 좋았다. 이제 펄스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골칫거리가 되어버렸다.

“두 번 말하지 않겠어,” 개리스 왕자가 분노하며 대답했다. “당장 내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은 뒤 그 옷을 태워버려. 피 묻은 흔적은 모두 지워. 그리고 성에서 사라져. 오늘 밤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 내 말 알아 듣겠어?”

왕자는 펄스를 뒤로 밀치고는 다시 뒤돌아 뛰었다. 복도를 지나 원형의 석조 계단을 뛰어내려가며 한 층씩 아래로 움직여 행랑채로 향했다.

마침내 왕자는 지하에 도착했고 길을 틀자 하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엄청난 크기의 화분을 닦으며 물을 끓이고 있었다. 벽돌 가마에서는 화마가 이글거리고 있었고 앞치마를 두른 하인들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저 멀리 반대편에 커다란 폐기 관이 있었다. 매 분마다 폐기 관을 통해 오물이 쏟아져 내려오며 주변으로 악취가 가득한 오물이 튀기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가장 가까이 있는 하인에게 다가가 절실한 마음을 담아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 오물 통이 언제 비워지지?” 왕자가 물었다.

“방금 전에 비우기 위해 강으로 가져갔습니다, 왕자님.”

개리스 왕자는 뒤돌아 밖으로 뛰어나갔다. 왕실의 복도를 지나 다시 석조 계단을 올라 서늘한 밤공기를 가로질렀다.

잔디밭을 지나, 숨을 헐떡이며 강으로 달려갔다.

강 주변에 큰 나무 아래에 몸을 숨길만한 장소가 있었다. 왕자는 두 명의 하인이 커다란 금속 오물 통을 기울여 강물에 오물을 쏟는 장면을 지켜봤다.

왕자는 오물 통이 완전히 뒤집혀 내부가 완전히 비워진 뒤 다시 궁궐로 실려 가는 모습을 살폈다.

마침내, 개리스 왕자는 만족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검을 보지 못했다. 그게 어디 있었든, 이제는 강물에 휩쓸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쓸려갔을 것이다. 만약 폐하께서 오늘 밤 승하하신다면, 암살자를 추적할 그 어떤 단서도 남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단서를 어디서 찾는 단 말인가?

제5장

왕의 침실로 향하는 뒷길을 헤치며 토르는 리스 왕자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 뒤로는 크론이 함께 했다. 리스 왕자는 토르와 크론을 석조 벽면에 몰래 만들어 놓은 비밀 문으로 안내했다. 왕자는 횃불을 들고 좁은 공강의 통로로 인도했다. 이리저리 구불구불하게 난 궁궐의 내부를 걸어 들어갔다. 좁은 석조 계단을 오르니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방향을 틀자 이번엔 다른 계단이 보였다. 토르는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구조에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통로는 수백 년 전에 왕실 내부에 비밀스럽게 만들어졌어,” 리스 왕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길을 안내하며 토르에게 설명했다. 길을 따라 올라가느라 왕자의 숨이 거칠었다. “이 길은 내 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였던 3대 맥길 왕께서 만드신 거야. 성이 포위당한 뒤에 탈출구 용도로 만들어놓으신 거지. 아이러니하게도 이걸 만든 뒤 맥길 왕가의 왕실은 한번도 포위당한 적이 없었어. 그래서 이 통로는 수백 년 동안 사용된 적이 없었지. 여길 막아놨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 우연히 발견했어.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이 통로를 이용해 왕실 내부를 돌아다니는 게 좋아. 그웬 누나와 고드프리 형과 나는 어렸을 때 여기서 숨바꼭질을 했었어. 캔드릭 형은 숨바꼭질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았고 개리스 형은 우리와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 횃불은 사용 금지였어. 그게 우리의 규칙이었지. 칠흑 같은 암흑만이 있었어. 그땐 그게 참 무서워 겁을 냈었지.”

토르는 리스 왕자가 안내하는 놀라울 정도로 기괴한 길을 열심히 따라 갔다. 리스 왕자는 확실히 통로의 모든 길을 훤히 꿰뚫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이 길을 모두 기억하시죠?” 토르가 놀라 물었다.

“어렸을 때 왕실에서 외롭게 자라서,” 리스 왕자가 대답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은 다 나이가 많았고, 또 왕의 부대에 합류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어렸고, 그래서 아무 것도 할게 없을 때 난 내 스스로에게 이 곳의 구석구석을 확인하라는 임무를 부여했었지.”

두 사람은 또다시 방향을 틀었다. 석조 계단을 세 걸음 내려가 좁은 벽으로 방향을 바꾼 뒤 다시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리스 왕자는 먼지로 가득한 묵직한 떡갈나무로 만든 문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왕자는 한쪽 귀를 문으로 바짝 붙이고는 귀를 기울였다. 토르는 왕자 옆으로 다가갔다.

“이게 무슨 문이죠?” 토르가 물었다.

“쉿,” 리스 왕자가 주의를 줬다.

토르는 질문을 멈추고 한쪽 귀를 문에 대어 주의를 기울였다. 크론이 토르 옆에 앉아 토르를 바라봤다.

“이건 아버지 침실로 향하는 뒷문이야,” 리스 왕자가 속삭였다. “지금 아버지 곁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토르는 방안의 소리를 들었다. 문 안쪽에서 음성이 들렸다.

“사람들이 가득 있는 것 같아,” 왕자가 말했다.

리스 왕자는 고개를 돌려 토르를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넌 짚을 지고 불에 뛰어들게 될 거야. 폐하의 사령관들이 모두 저 안에 있고, 자문단과 고문관 그리고 내 가족들이 저 안에 있어. 분명 저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널 살인자로 여기며 경계할거야. 잔뜩 성이 난 군중들에게 뛰어드는 것과 다를 게 없어. 만약 폐하께서 여전히 네가 독살을 꾸몄다고 생각하고 계시다면 넌 끝이야. 이래도 정말로 이걸 해야겠어?”

토르는 크게 침을 삼켰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인생의 큰 전환점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자 목이 바짝 타 들어갔다. 토르가 선택할 수 있는 쉬운 길은, 다시 이 길을 돌아가 성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럼 왕실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안전하게 은신하며 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토르는 저 문을 열고 들어가 아마도 그때 보았던 형편없을 인간들과 지하감옥에서 평생을 살게 되거나 또는, 처형을 당하게 된다.

토르는 숨을 크게 쉬고 결정을 내렸다. 물러설 수 없었다. 당당히 악마의 장난을 마주해야 했다.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말을 꺼내기에 겁이 났다. 입을 열면 마음이 바뀔 것 같았다.

리스 왕자도 동의하는 표정으로 토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철문 고리에 힘을 주며 어깨로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시야에 밝게 빛나는 횃불이 들어왔다. 토르가 서 있는 곳은 왕의 개인 침실 정 중앙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리스 왕자와 크론이 그 옆을 지켰다.

누워있는 맥길 왕 곁으로 적어도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몇 명은 왕의 곁에 서 있었고 나머지는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자문위원단들과 사령관들이 아르곤, 왕비, 캔드릭 왕자, 고드프리 왕자 그리고 그웬돌린 공주 곁에 함께 서 있었다. 왕의 죽음을 지키고 있었다. 토르는 맥길 왕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난데없이 등장한 셈이었다.

방안의 분위기는 어두웠고 모든 이들의 표정은 침울했다. 맥길 왕은 베개에 기대 누워 있었고 토르는 맥길 왕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살아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일제히 모든 시선이 난데없이 나타난 토르와 리스 왕자에게 향했다. 방 한가운데서 자신과 리스 왕자가 비밀의 문을 열고 갑자기 나타났으니 침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분명 적잖이 당황하고 놀랠 거라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저 아이가 범인이야!” 누군가가 증오에 섞인 말투로 토르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자가 감히 폐하를 독살하려 했어!”

사방에서 병사들이 토르를 향해 다가왔다. 토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막막했다. 한편으로는 다시 돌아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렇게 하면 분노에 사로잡힌 군중들을 마주해야 했다. 토르는 왕에게 해명을 해야 했다. 병사들이 재빨리 손을 뻗어 토르를 붙잡으러 일제히 달려들었다. 크론이 토르의 곁을 지키며 병사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으르렁거렸다.

그 자리에 서 있던 토르는 순간적으로 몸 속의 에너지가 발현돼 온몸에 기운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토르는 본의 아니게 한 손을 올려 자신의 에너지를 병사들에게 보냈다.

그러자 마치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멈춰 움직이지 못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토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체 불명의 에너지가 병사들이 토르에게 달려들 수 없도록 막아주고 있었다.

“감히 네가 어찌 이곳에 나타나 마법을 부리는 것이냐!” 총 사령 고문관인 브롬이 검을 뽑아 들며 고함쳤다. “폐하를 음해하려던 시도가 한번으론 부족했단 말이냐?”

총 사령 고문관이 검을 들고 토르에게 다가가자 토르는 전에 없던 강력한 기운을 느꼈다. 토르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총 사령 고문관이 지닌 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의 모양과 금속재질을 느끼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검과 하나가 됨을 느꼈다. 토르는 마음속으로 검이 멈추길 염원했다.

총 사령 고문관은 놀란 눈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아르곤!” 총 사령관은 소리쳤다. “이 마법을 멈춰주시오! 이 소년을 멈춰주시오!”

아르곤은 앞으로 나서 천천히 그의 망토를 눌러 썼다. 그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토르를 주시했다.

“저 아이를 막을 이유가 없소,” 아르곤이 대답했다. “저 아이는 누굴 헤치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제 정신이오? 저 아이는 폐하를 죽일 뻔 했소!”

“그건 당신 생각이오,” 아르곤이 대답했다. “내가 보는 건 다르오.”

“그를 내버려 두어라,” 어디선가 엄중하고 깊은 목소리가 울렸다.

맥길 왕이 몸을 일으키자 모두가 시선을 왕에게 돌렸다. 왕은 기력이 많이 쇠해 보였다. 목소리를 내는 것 조차 힘에 겨웠다.

“저 아이를 보고 싶구나. 저 아이는 나를 찌르지 않았다. 난 그자의 얼굴을 봤어, 저 아이가 아니야. 토르는 결백하다.”

서서히 사람들의 경계가 풀어지기 시작했고 토르 또한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병사들을 자유롭게 풀어줬다. 병사들은 마치 토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인 듯 토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들의 검을 칼집에 다시 집어 넣었다.

“아이를 보고 싶다,” 맥길 왕이 명령을 내렸다. “단 둘이 보겠다. 모두 물러나거라.”

“폐하,” 총 사령관 브롬이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래도 안전하겠습니까? 저 아이와 단둘이요?”

“토르를 내버려두거라,” 왕이 다시 한번 명령했다. “이제 모두 물러가거라. 전부 다. 내 가족들도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방안에는 깊은 적막이 흘렀다. 토르는 이 모든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인지 마치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굳어있었다.

가족들을 포함해 차례대로 한 사람씩 방에서 물러났다. 크론 또한 리스 왕자와 함께 방을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던 왕의 침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방문이 닫히고 토르와 맥길 왕만이 적막 속에 남겨졌다. 토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창백한 안색의 맥길 왕이 고통을 인내하며 침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치 자신의 일부가 저 침상에서 죽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무엇보다 맥길 왕이 쾌차하길 바랬다.

“이리 오거라, 토르,” 맥길 왕이 쉬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힘없이 말했다.

토르는 몸을 숙이고 재빨리 왕의 곁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맥길 왕은 힘없이 손목을 내밀었고, 토르는 왕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토르는 고개를 들어 맥길 왕의 입가에 희미하게 번진 미소를 봤다. 순간 토르의 빰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스스로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토르가 참지 못하고 서두르며 입을 열었다. “제발 저를 믿어주십시오. 저는 폐하를 독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꿈에서 본 것입니다. 저도 알지 못하는 힘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그저 폐하께 알려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제발 부디 저를 믿어주십시오.”

맥길 왕은 손바닥을 들어올렸고 토르는 말을 멈췄다.

“내가 오해했구나,” 왕이 대답했다. “다른 이의 칼에 찔린 뒤 네가 범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넌 그저 날 구하려 했던 것이었구나. 날 용서해다오. 넌 충심을 다했어. 아마도 궁궐 안의 유일한 충심일 수도 있겠지.”

“제가 틀렸기를 바랬습니다,” 토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안전하시길 바랬습니다. 제 꿈이 단지 환영이기만을 바랬고 폐하께서 절대 암살당하시는 일은 없길 바랬습니다. 아마도 제가 틀린 것일 겁니다. 폐하께서는 꼭 이겨내실 겁니다.”

맥길 왕은 손을 저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구나,” 왕이 대답했다.

토르는 그런 일이 일어나질 않길 바라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없음을 짐작했다.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아시는지요, 폐하?” 토르는 꿈을 꿨던 순간부터 참을 수 없이 궁금했던 질문을 내뱉었다. 대체 누가 왕을 없애고 싶어하는지, 또는 왜 왕을 제거하려고 하는지 토르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맥길 왕은 천장을 바라보고 간신히 눈을 깜빡였다.

“얼굴을 보았다. 아는 얼굴이지.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구나.”

왕은 토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젠 다 소용 없다. 가야 할 시간이구나. 그자의 손에 죽건, 또는 다른 누구였건, 결과는 어차피 같단다. 지금 중요한 건,” 왕은 이 말과 함께 손을 뻗어 토르의 팔목을 잡았다. 그 힘이 너무 세 토르는 크게 놀랐다. “내가 떠난 뒤에 벌어질 일이란다. 이곳은 왕이 없는 왕국이 될 거야.”

맥길 왕은 토르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강렬한 눈빛으로 토르를 바라봤다. 토르는 왕이 건네는 말의 의미를, 또는 요구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토르는 묻고 싶었지만 맥길 왕이 얼마나 힘겹게 숨을 고르며 의사를 전달하는지 알고 있기에 질문을 참고 계속 경청했다.

“아르곤이 맞았다,” 맥길 왕은 손목의 힘을 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 운명은 내가 타고난 운명보다 위대해.”

맥길 왕의 말에 토르는 감전된 듯한 충격을 느꼈다. 토르의 운명? 왕보다 위대한 운명? 맥길 왕이 직접 아르곤과 자신에 대해 상의 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 왕보다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실 자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맥길 왕이 망상에 빠진 것일까?

“난 널 선택했다. 널 내 아들로 삼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 이유가 뭔질 알겠느냐?”

그 이유가 절실히 궁금한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왜 내가 널 이곳에 남겼는지 모르겠느냐, 너만 홀로, 나의 마지막 순간에?”

“폐하, 송구스럽습니다,” 토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두 눈에 서서히 힘이 풀리며 맥길 왕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아주 먼 곳에 위대한 곳이 있단다. 와일드 너머에, 용의 터전 너머에. 그곳의 드루이드의 터전이지. 그곳에서 네 모친이 왔단다. 넌 반드시 그곳으로 가 답을 얻어야 한다.”

맥길 왕은 눈을 크게 뜨고 강렬하게 토르를 바라봤다. 토르는 차마 헤아릴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이 왕국은 네 손에 달려있다,” 맥길 왕이 말을 이었다. “넌 남들과 다르단다. 특별해. 네가 누구인지를 이해할 때까지, 이 왕국은 절대 평탄하지 못하겠지.”

눈을 감은 맥길 왕의 숨소리가 더없이 희미했다. 한숨 한숨이 순탄치 않았다. 토르의 손목을 쥔 힘이 천천히 힘을 잃어갔다. 토르는 눈물을 흘렸다. 왕이 건넨 말을 이해하고자 할수록 토르의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걸 까?

왕은 무언가 힘없이 속삭였다. 그러나 쉽게 들리지 않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토르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맥길 왕의 입가에 귀를 기울였다.

맥길 왕은 마지막으로 최후의 기력을 발휘해 고개를 들었다.

“내 원수를 갚거라.”

이 말과 함께 맥길 왕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잠시 동안 누워 있었고, 이후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떨군 뒤 그대로 굳어있었다.

죽음이 드리웠다.

“안돼!” 토르는 통곡했다.

토르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병사들에게까지 들려,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방 안으로 달려들어왔다. 그의 주변으로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렴풋이 성의 종소리가 끊임없이 계속해서 울리는 걸 들었다. 울려대는 종 소리에 맞춰 관자놀이 부위가 지끈거리며 요동쳤다. 그리고 잠시 뒤 방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토르는 돌 바닥에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제6장

격한 돌풍이 개리스 왕자의 얼굴을 강타하자 개리스 왕자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훔쳤다. 흐릿한 빛과 함께 첫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막 날이 밝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에서 멀리 떨어진 콜비안 협곡에는 왕의 가족, 친구 그리고 가까운 왕족 수백 명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있었다. 이들 뒤로는 왕의 장례를 멀리서나마 지켜보려는 수천 수만의 인파들을 병사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군중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슬픔은 진심이었다. 맥길 왕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군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다.

개리스 왕자는 직계 가족과 함께 맥길 왕의 사체 주변으로 반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맥길 왕의 사체는 땅속으로 이동시킬 수 있도록 밧줄로 묶어 지탱해놓은 판자 위에 놓여있었고 그 밑으로는 크고 깊게 판 무덤 자리가 있었다. 장례식에만 갖춰 입는 짙은 다홍빛 망토를 걸친 아르곤이 사람들 앞에 나섰다. 망토를 눌러써 얼굴이 가리워진 아르곤은 묘사할 수 없는 표정으로 왕을 내려다봤다. 개리스 왕자는 아르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그의 표정을 읽어보려 애썼다. 아르곤은 개리스 왕자가 맥길 왕을 살해한 걸 알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모두에게 이를 알릴 것인가, 또는 운명의 흐름을 그저 지켜볼 것인가?

개리스 왕자에겐 불행하게도, 눈에 가시 같은 토르의 결백이 밝혀졌다. 토르가 지하 감옥에 있는 동안 왕을 암살했다는 건 명백하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맥길 왕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토르의 무죄를 입증해줬다. 이 모든 것이 개리스 왕자에겐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 사건을 진상을 명명백백히 파헤치기 위해 이미 진상 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개리스 왕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제 곧 땅속에 묻힐 아버지의 사체를 보며 요동치는 심장을 느꼈다. 그도 함께 묻히고 싶은 마음이었다.

범인이 펄스로 좁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개리스 왕자는 펄스와 함께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될 게 뻔했다. 왕자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게끔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야 했다. 개리스 왕자는 혹시 주변의 인물들이 자신을 의심하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는 편집증 환자처럼 주변의 시선을 살펴 그 누구도 자신을 주시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왕자의 주변에는 리스 왕자와 고드프리 왕자, 캔드릭 왕자 그리고 그웬돌린 공주와 왕비가 서 있었다. 왕비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 드리워 있었다. 왕비는 분열증세를 보였다. 실제로 맥길 왕의 사망 이후부터 왕비는 말문이 막혀버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개리스 왕자가 듣기로는, 왕비가 왕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심각한 정신적 충격과 함께 마비 증상이 왔다고 했다. 왕비의 한쪽 얼굴은 굳어버렸고 무언가를 말할 때는 말이 느릿느릿했다.

개리스 왕자는 왕비 뒤로 줄지어 선 왕의 자문위원단들의 표정을 주시했다. 앞으로는 총 사령 고문관인 브롬과 왕의 부대 총 책임자인 콜크 사령관이 서 있었고 그 뒤로는 수도 없이 많은 고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슬픈 표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개리스 왕자는 이들의 이면을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자문단과 고문들, 그리고 사령관들과 모든 귀족 및 영주들 모두가 왕의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이들의 얼굴에서 야심을 포착했다. 권력을 향한 탐욕. 모두가 왕의 사체를 바라보며 다음 왕좌에 앉게 될 인물이 누가 되야 할지를 계산하는 듯 했다.

그것이야 말로 개리스 왕자가 궁금한 것이었다. 이렇게 혼란을 이룬 암살의 여파는 무엇일까? 만약 이번 일이 깔끔하게 잘 마무리되어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덮어씌운다면, 개리스 왕자의 계획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왕좌에 앉을 수 있게 된다. 어찌됐든 그는 적자에 장자였다. 맥길 왕이 그웬돌린 공주에게 승계를 하겠다고 선언하긴 했으나, 당시 형제들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왕은 이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 개리스 왕자는 자문위원단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겐 법이라는 정당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공식 표명 없이 그웬돌린 공주가 왕좌에 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왕좌의 기회는 다시 개리스 왕자에게 돌아오게 된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 개리스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겠다 수락만 한다면 그가 바로 왕이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법이었다.

그의 형제들은 분명 그에게 맞설 것이다. 다른 왕자들은 맥길 왕과의 회담을 기억하며 그웬돌린 공주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캔드릭 왕자가 왕권을 욕심 낼 일은 만무했다. 그러기엔 그의 심성이 너무 착했다. 고드프리 왕자는 왕권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리스 왕자는 아직 어렸다. 개리스 왕자를 위협할 유일한 인물은 바로 그웬돌린 공주였다. 그럼에도 개리스 왕자는 낙관적이었다. 자문단이 십대 계집아이를 링 대륙을 통치할 왕으로 모실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왕의 공식 표명이 없었기 때문에 자문단은 이를 핑계로 공주에게 왕위를 허락하지 않아도 될 완벽한 이유가 있었다.

개리스 왕자의 심중 속에 있는 진정한 위협은 바로 캔드릭 왕자였다. 어찌됐든, 개리스 왕자 자신은 모두에게 미움을 사고 있는 반면, 캔드릭 왕자는 자문단과 기사들 모두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자문단이 얼마든지 왕권을 캔드릭 왕자에게 넘길 확률이 컸다. 개리스 왕자가 왕위에 빨리 오를수록, 왕권을 이용해 좀더 빨리 캔드릭 왕자를 견제할 수 있었다.

개리스 왕자의 손에 무언가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보니 쥐고 있던 밧줄이 움직이며 왕자의 손바닥을 쓸고 있었다. 맥길 왕의 관을 내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개리스 왕자와 함께 각자 밧줄을 쥐고 있던 왕자들이 서서히 줄을 풀어 관을 내리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 쪽으로 관이 기울어졌다. 개리스 왕자가 미처 줄을 제대로 풀지 못한 것이었다. 개리스 왕자는 다른 손을 뻗어 줄을 풀며 수평을 맞췄다.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인의 마지막 길 앞에서도 그는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저 멀리 궁에서 종소리가 울려오자 아르곤이 앞으로 나와 손바닥을 높이 들었다.

“잇소 오미너스 도미 코 레세피아…”

수천 년 전 개리스 왕자의 조상이었던 고대 링 대륙의 왕족이 사용하던 왕족의 언어, 자취를 감춘 링 대륙의 언어였다. 개리스 왕자의 개인 교사는 개리스 왕자가 어렸을 때 이 언어를 지도했다. 그리고 이 언어야말로 왕권 승계를 위해 반드시 알아둬야 하는 언어였다.

아르곤이 갑자기 멈춰 고개를 들고 개리스 왕자를 정면으로 주시했다. 아르곤의 반투명한 눈동자가 마치 개리스 왕자를 태우는 것 같은 느낌에 왕자는 등줄기에 한기를 느꼈다. 왕국 전체가 모두 자신을 주시하는 것만 같아 왕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아르곤의 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가 눈치챌까 두려웠다. 아르곤의 시선에서 자신이 암살에 연루됨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풍겨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아르곤은 인간의 운명이란 우여곡절에 관여하길 거부하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아르곤은 과연 그렇게 침묵을 지킬 것인가?

“맥길 왕은 훌륭하고 정당한 왕이었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깊은 목소리로 아르곤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맥길 왕은 왕으로서 선대 왕들의 자부심과 존경심을 발휘했고, 그 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풍요와 평화를 왕국에 선물했소. 신의 뜻에 따라 왕은 조기에 생을 마쳤소. 그럼에도 그는 풍부하고 깊은 유산을 남겼소. 이제는 우리가 그 전통을 이을 차례요.”

아르곤은 잠시 침묵했다.

“링 대륙의 서부 왕국은 오랜 세월 이곳을 탐해온 불길한 적들로부터 사방이 둘러 쌓여 있소. 그리고 캐니언 협곡 너머에 자리잡은 에너지 장벽만이 이곳을 보호해주는 유일한 장치요. 그 너머에는 이 왕국을 붕괴하려는 미개한 생명체들이 숨쉬고 있소. 링 대륙 내에서도 하이랜드의 반대편에는 우리를 위협하는 가문이 존재하오. 우리는 현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번영과 평화 속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안전은 순간일 뿐이오. “

“왜 신은 우리에게서 가장 선하고 현명하고 공정했던 왕을 데려간 것인가? 왜 그의 운명은 이러한 암살로 마감하게 됐는가? 인간은 모두 운명의 손에 좌우되는 꼭두각시일 뿐이오. 이렇게 모든 이들 위에서 군림하던 왕도 땅 속에 잠들게 됐소. 우리가 고심해야 할 문제는 바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고군분투하느냐가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가요.”

아르곤은 고개를 숙였다. 밧줄을 풀어 관을 내리는 개리스 왕자의 손바닥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침내 관은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닿았다.

“안돼!” 비통한 외침이 들렸다.

그웬돌린 공주였다. 넋이 나간 공주는 깊게 판 구덩이 속으로 빠지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리스 왕자가 달려 나와 뒤에서 공주를 붙잡았다. 캔드릭 왕자도 나서 공주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개리스 왕자는 공주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공주의 행동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만약 공주가 아버지와 함께 묻히길 희망한다면 선뜻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랬다, 정말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

토르는 관에서 한 반짝 떨어진 곳에서 맥길 왕의 사체가 땅속으로 묻히는 걸 지켜봤다. 주변의 경관이 가히 압도적이었다. 왕은 자신이 묻힐 장소로 매우 장엄한 곳을 선택했다. 왕국의 가장 높은 절벽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이곳은 장엄한 높이를 자랑하듯 마치 구름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첫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 오르자 구름 빛이 주황, 초록, 노랑,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럼에도 마치 왕국 전체가 통한에 빠진 듯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다. 토르 옆에는 크론이 훌쩍이고 있었다.

새 울음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에스토펠레스가 원을 그리듯 하늘을 날며 지켜보고 있었다. 토르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지난 며칠간 일어난 일을 실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왕의 가족과 함께 이곳에 서서 자신이 그토록 충성하고 사랑했던 왕이 차가운 땅속으로 묻히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토르는 이제서야 진심으로 자신을 자식처럼 대해준 누군가를 만났는데 이제 그 아버지 같은 존재가 사라져버렸다. 그 무엇보다 왕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넌 남들과 다르단다. 특별해. 네가 누구인지를 이해할 때까지, 이 왕국은 절대 평탄하지 못하겠지.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걸까? 나는 정말 무구인가? 내가 어떻게 특별하단 말인가? 폐하께서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단 말인가? 나의 운명이 이 왕국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폐하께서 정신을 잃고 허언을 하신 것일까?

이곳에서 아주 먼 곳에 위대한 곳이 있단다. 와일드 너머에, 용의 터전 너머에. 그곳의 드루이드의 터전이지. 그곳에서 네 모친이 왔단다. 넌 반드시 그곳으로 가 답을 얻어야 한다.

폐하께서 어떻게 내 모친을 알고 계실까? 내 모친이 어디에 있는지 폐하께선 어떻게 아시는 걸까? 그리고 내 모친은 어떤 답을 가지고 계시단 말인가? 토르는 항상 자신을 나아준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살아있는다는 말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모친을 찾으러 나서겠다고 결정했다. 답을 얻기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 그리고 왜 자신이 특별한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종 소리가 들리자 맥길 왕의 관이 서서히 땅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토르는 운명이라는 게 어디까지 잔인하게 얽히고 설킬 수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죽음을 예언했는지, 왜 미래를 보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길 바랬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차라리 모르길 바랬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왕의 승하 소식을 전해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무고한 제 3자가 되길 바랬다. 좀 더 많은 시도를 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앞으로 왕국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왕이 부재한 왕국이었다. 누가 왕위를 승계할 것인가? 모두가 짐작하듯, 개리스 왕자가 왕이 될 것인가? 이 보다 끔찍한 일은 없었다.

토르는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다, 링 대륙 곳곳에서 올라온 귀족들과 영주들의 굳은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토르는 저들이, 끊임 없이 사건이 일어나는 왕국 내에서 세력을 쟁취하고 또 그 힘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리스 왕자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누가 암살자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저 표정으로 보아 마치 모두가 범인인 듯 했다. 저 사람들 모두 권력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왕국은 분열될 것인가? 저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힘을 겨룰 것인가? 내 운명은 무엇일까? 왕의 부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왕의 부대가 폐지될까? 병사들은 해체될까? 개리스 왕자가 왕이 된다면 실버들은 반란을 일으킬까?

한편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지금, 다른 사람들이 진정 내 결백을 믿어 줄까? 다시 고향으로 추방당할까?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토르는 지금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이 곳, 왕의 부대에 머무르고 싶었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길 바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왕국은 무엇보다 단단하고 영원할 것만 같았다. 맥길 왕의 통치 또한 영원할 것 같았다. 만약 매우 안전하고 견고한 무언가가 이렇게 갑자기 산산조각 나버릴 수 있다면, 그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단 말인가? 더 이상 토르에겐 그 무엇도 영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웬돌린 공주가 땅속에 묻힌 폐하에게 뛰어드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무너졌다. 리스 왕자가 공주를 붙잡자, 시중들이 깊이 파인 땅에 다시 흙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르곤은 여전히 장례 절차를 치르고 있었다. 하늘 위로 구름이 흘러가며 잠시 첫 태양을 가리웠다. 토르는 따뜻한 여름 날 갑작스럽게 차가운 바람이 스쳐감을 느꼈다.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 아래를 보니 크론이 토르의 발 밑에서 토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토르는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했다. 그웬 공주와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폐하의 죽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공주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해야 했다. 그녀 옆에 자신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공주가 다시는 토르를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다는 걸, 사창가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알려줘야 했다. 기회를 얻고 싶었다. 그웬 공주가 평생 자신을 내치기 전에 오해를 풀 딱 한번의 기회면 족했다.

 

마지막 흙을 덮고 나니 종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알아서 배열을 바꿨다. 끝이 없이 긴 줄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모두가 한 송이의 흑장미를 손에 들고 절벽 너머까지 줄을 지어 순서대로 방금 흙을 덮은 왕의 무덤을 지났다. 토르 또한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이미 높이 쌓여있는 장미 더미에 장미 한 송이를 올리며 예를 갖췄다. 크론이 울어댔다.

군중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사방으로 분산됐다. 때마침 토르는 리스의 손을 뿌리치고 저 멀리 어딘가로 정신 없이 뛰쳐나가는 그웬 공주를 발견했다.

“그웬 누나!” 리스 왕자가 공주를 쫓아가며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공주는 슬픔을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공주는 빽빽하게 밀집된 군중을 뚫고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진흙 길을 달렸다. 공주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공주와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토르는 곧장 공주를 따라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크론도 전속력을 다해 달렸다. 수많은 인파를 가르며 공주를 따라잡기 위해 그녀를 쫓았다. 마침내 토르는 인파를 헤치고 저 멀리 달려가고 있는 공주를 발견했다.

“그웬돌린!” 토르가 큰 소리로 공주를 불렀다.

공주는 계속해서 달렸고 토르도 두 배의 속도로 공주의 뒤를 따랐다. 그 옆을 쫓는 크론이 소리를 질러댔다. 토르는 숨이 타 들어갈 정도로 더욱 더 빨리 속도를 냈고 마침내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토르는 공주의 한 손을 잡아 공주를 멈춰 세웠다.

공주는 팔을 저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눈물 범벅이 되어 머리카락이 양 볼에 엉킨 채 토르의 팔을 내쳤다.

“내버려 둬!” 공주가 소리질렀다. “널 보고 싶지 않아! 다시는!”

“그웬돌린,” 토르가 애원했다. “난 공주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 폐하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폐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 폐하를 해치려던 게 아니라 구하려고 했을 뿐이라고요.”

공주는 달아나려 했지만 토르는 공주를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공주를 보낼 수 없었다. 공주는 몸부림을 쳤지만 더 이상 달아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흐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네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는 걸 알아,” 공주가 대답했다. “그래 봤자 달라질 건 하나도 없어. 모두 앞에서 내게 망신을 줘 놓고 어떻게 감히 나를 찾아와 말을 걸 생각을 해? 더군다나 다른 때도 아닌 지금 이 순간에.”

“그렇지만 공주는 잘 못 알고 있어요. 그 사창가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모두 거짓말이에요. 그건 다 사실이 아니라고요. 누군가의 모략에 빠진 거에요.”

공주는 가늘게 눈을 뜨며 토르를 바라봤다.

“그래서 네가 사창가에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한 토르는 머뭇거렸다.

“갔어요. 모두와 함께 갔었어요,”

“그럼 네가 낯선 여자와 함께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야?”

당황한 토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들어 갔었죠,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라니,” 공주가 말을 끊었다. “그럼 인정하는 거네. 넌 역겨워. 더 이상 너와는 볼 일 없어.”

슬픔에 넋이 나갔던 공주의 얼굴이 분노로 바뀌었다. 울음을 그친 공주의 감정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공주는 매우 침착하게 토르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두 번 다시는. 내 말 알아 듣겠어? 무슨 생각으로 너와 함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군. 어머니 말씀이 맞았어. 넌 어쩔 수 없는 평민이야. 넌 내 명령이나 받드는 사람이지.”

공주의 말이 비수처럼 토르의 영혼을 관통했다. 칼에 심장이 찢겨나가는 기분이었다.

토르는 붙잡고 있던 공주의 팔목을 놓아준 뒤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아마도 알톤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토르는 그저 공주의 장난감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토르는 말없이 뒤돌아 공주에게서 멀어졌다. 크론이 토르를 따랐다. 토르는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이곳에 대한 모든 미련을 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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